요즘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처음엔 장난으로 아이패드에다가 쓱쓱 그렸는데 너무 못 그려서 남편이 재밌다고 한 게 시작이었다.
모든 일의 처음은 그렇게도 어처구니 없이, 우연한 기회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림일기 식으로 몇 번 그려줬더니 좋단다.
“당신 그림의 가장 큰 매력이 뭔지 알아?“
(눈을 반짝이며) “뭔대?”
“응..못 그렸다는거야”
“…”
그제서야 잘 그려야겠다는 부담감없이 더 내키는대로 막 그리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누군가 내 그림을 보고 “어머 느낌있다. 원래 그림을 잘 그렸어?” 라고 물었다. 이 질문이 도대체 맞게 한 것인지, 그러니까 내 그림을 보고 한 질문이 맞는건지, 농담인건지 몇 초간 생각해야했다.
왜냐면 나의 그림에는 ‘한’과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때 배운 그림은 사람을 그릴 때 동그라미를 그리고 팔 다리와 몸통을 그린다. 여자면 머리를 길게 남자면 머리를 짧게 그렸고. 해를 그렸고, 산과 집 모양을 그리고 자동차를 그렸다.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조금 만 더 복잡한 뭔가를 그리려면 아주 힘들었다.
어른은 크게 아이는 작게 그리고 뭔가 동작을 그릴 수는 없었다. 항상 전면을 보고 차례 자세로 서서 있는 사람만 그렸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의 그림 실력은 고3때까지 전혀 발전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냥 ‘초딩 그림 답네’ 였으나 점점 정물화와 실물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그림자를 표현해야 하는 고 난이도의 그림으로 발전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뒤 늦게 “내가 미술학원을 안다녀서” 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댔고, 그것도 안 먹히자 “이런 미술 실력은 유전 아닌가? 예체능 실력 없는건 모두 엄마 아빠가 그림을 못 그려서”라고 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 시간에 빨래비누를 가지고 손 모양 조각을 해서 내는 시간이 있었다. 집에 있는 빨래 비누 대여섯개를 점점 깍아가며 손이 아기손이 되다가 결국 더 작아지며 사라지기를 몇 번. 결국 결과물을 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고.
나는 친구가 도저히 못 쓰겠다 하며 버리는 비누를 주어서 “이거 나 주면 안되겠니? 친구야?” 하며 애절한 눈빛을 보낸 후에 전혀 미련없이 내어준 그 비누를 너무나 감동스러워 하며 제출했던 기억.
한 여름 땀을 뚝뚝 흘리며 먹을 갈아 난을 그리는 동양화. 집에 업드려 먹만 몇날 몇일 갈며 종이를 하염없이 버려가며 그리다가 정말 봐주기 힘든 그림을 제출 했던 기억.
이 모든 기억으로 인해 나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고역’ 또는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기억들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어머, 그림에 소질 있네? 원래 그림 좀 그렸어?”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이없는 질문인지…
그 질문들을 들을 때마다 나의 흑역사를 설명하기에도 이제 지친다. 세월이 흘러흘러 이제 ‘초딩 같은’ 나의 그림이 인정을 받는 세상이 왔나.
아마 내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도 그 흑역사는 되풀이 되겠지.
이제 일러스트 툴을 몇 개 배워서 아이패드로 그리던 그림을 일러스트로 그려보고 있는데 한번 수정 하려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그리기 일쑤.
딸 방에 놓아줄 그림들을 그려야겠다로 시작해서 몇 몇 그려 보니 반응이 또 괜찮다. 더 만들어서 친구에게 선물도 했다.
어느 날 아는 분께서 카페를 내는데 카페 네임에 고양이가 들어가길래 간판을 고양이로 그려보는게 어떠냐고 하며 내가 그냥 슥슥 그린걸 보여주니 너무 좋다며 날으는 고양이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셨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아서 그리려니 고양이의 수염 각도와 길이까지 신경이 쓰인다. 내 그림이였으면 그냥 쓱쓱 삐뚤빼뚤하게 그리고 말았을텐데… 역시 뭔가 창작을 해서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건 엄청난 정신 노동이다. 처음엔 그냥 제가 이렇게 그림 못그리는데 이 스타일로 그려드릴게요로 시작을 했지만 정말 그렇게 막 그릴 수 없어 그리다 보니까 그림은 좀 더 정제가 되었을 지 모르지만 이제 난 다시 못 그리는 그림에서 잘 그리는 그림으로 가고 싶어 하는 단계에 서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책을 사서 혼자 독학도 해 보고 그림 그리는 책들이 많이 나와있으니 보고 따라 그리다 보면 실력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책들도 샀다.
여행을 가서 사진 찎는 것도 좋지만 그림을 그려서 남기는 일도 꽤나 멋진 일 같고. 하루의 일기를 사진으로 남기는 일만큼 그림으로 남기는 일이 참 재밌다는 사실.
“난 대한민국의 미술 교육이 전혀 맞지 않는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입니다.” 라고 언젠가 당당하게 말해 보고 싶은 작은 희망이 있다.
'Snap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 잃은 양 (0) | 2014.12.15 |
---|---|
폰 스택 게임의 루저 (0) | 2014.11.05 |
여의도 가을 (0) | 2014.11.04 |
감따러 갑니다. (0) | 2014.10.26 |
핑크 트럭 열풍 (0) | 2014.10.05 |
2013 가을 웰컴! (0) | 2013.10.17 |
20130613 (0) | 2013.06.13 |
20130606 (0) | 2013.06.06 |
요즘 유행하는 네일 (0) | 2013.06.06 |
마당에서의 바베큐 (0) | 2013.06.02 |